본문 바로가기

Poetry

가룟 유다도 받아 마땅한 회복

아담아, 유다야!

아담아, 아담아! 죽지 마라!

너가 죽으면

내가 세상을 구할 계획이 사라진단다

유다야, 유다야 죽지 마라

너가 죽으면

십자가 나의 피가

너를 회복할 기회가 사라진단다

 

<십자가 희생이 있기 전에는 모두 가룟 유다와 같았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시고 함께 식사하셨다.

식사 중에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 옆에 앉기를 원했다. 예수님과의 친근감의 표시라기 보다는 그저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자”라고 스스로 이야기 하는 요한도 그랬고, 주먹이 앞서는 베드로도 그랬으며 사리에 밝은 가룟 유다도 그랬다.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길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낮아지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 그것은 그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상적으로 말씀하시는 타이름이나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유다는 뚱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기에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뱃일로 단련된 베드로에 비해 행동이 둔했고, 거기다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기에 무거운 돈가방도 가지고 다녀야 하고 장부 정리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이정도로 이 무리에 기여하는데 예수님 오른편에 앉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유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앉히시고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과,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을 주시며 둘씩 짝을 지어 마을로 내려가라 하셨다. 유다도 마을로 내려가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경험을 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경험은 유다 뿐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경험한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제자들 스스로가 마술사가 된 느낌이었다.

베드로는 항상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의 보디가드가 되어드리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 유독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고 있었다.

굳이 떠올리자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 마리아가 귀한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그 진귀한 향이 온 방 가득 퍼졌고 그 향을 맡은 제자들이 그 광경을 보고 분을 내었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룟 유다의 분냄이 베드로의 분냄과 같았고 요한의 분냄과도 같았다.

결국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다.

그리고 유다의 예상과 달리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 가셨다.

유다 이외에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 판 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떠나 도망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보디가드 베드로는 예수님 면전에서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유다가 뉘우쳐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버리고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괴로워했다. 예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아담아 죽지 마라! 꼭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뜻을 유다는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유다는 스스로 죽음으로 회복의 기회를 놓쳤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살아 있음으로 그들의 잘못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주고 싶어 했던 기 기회, 유다도 받아 마땅한 그 기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유다와 같은 처지이다.

힘든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 예수님을 쫓아 다녔지만 소득 없는 것 같고, 예수님을 팔면 은 삼십이라도 받을 거 같아 하루에도 수없이 팔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매일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복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을 팔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