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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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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와 재판관 - 한번만 기도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한번만 기도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기도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기도 하는 것 자체가 의문스러운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이해가지 않았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같은 말을 돌려서 길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기도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이미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다 듣고 있고 알고 계시니 요점만 말하라는 뜻 아니겠는가? (어라 한번만 기도하란 뜻 같은데...) 그렇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왜 한가지 제목으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아침에 그 제목으로, 점심에 또 그 제목으로 저녁에 그 제목으로 기도하는 것은 중언부언과 다를 바 무엇인가? 하나님을 귀..
윤장로 아들들 윤장로 아들들 일요일 아침은 늘 피곤하다. 전날 저녁 테니스를 친 날이면 더 그렇다 목이 아프다고 하니 집사람이 “목아픈데는 프로폴리스가 즉빵”이라며 애들 다루듯 “물 한 모금 물고 아~ “하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프로폴리스가 아픈 목을 치료해 주진 못했지만 날 위해 이것 저것 신경써준 고마운 마음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단 생각이 든다.(자다 말고 ‘코도 아프네~’ 했더니 아로마 탄 물 한컵을 머리맡에 가져다 놓았다.) 집사람이 밥 먹으라며 날 흔들어 깨우지만 않았어도 12시까지는 뒤척이고 있었을 테지만, 휴일인데도 따듯한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집사람의 정성에 눈꼽도 떼지 않은채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어찌 알았는지 전화벨이 울린다. “밥 먹었나?” 옆집 사는 친구다. “방금 다 먹었다...
어두워지면 만나는 친구들 어두워지면 만나는 친구들 하루를 바쁘게 살다가 하나 둘씩 떠나는 사무실, 비로소 사무실은 쉼을 얻는다 복도 저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어둑해지는 시간, 다시 열리는 사무실이 한 곳 있다 평소 그곳은 본의 아니게 절제된 웃음소리와 어색한 만남이 있는 공간이지만 지금 이 시간은 완전히 달라진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잔잔한 대화가 있고 가끔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하루 종일 느끼지 못했던 그 자유함이 있다. 마치 웃음을 참았다가 이 시간 다 쏟아내는 듯 자유롭게, 그렇게 호탕하게 웃는다. 꽉 매었던 답답한 넥타이도 풀고, 까만 자켓도 벗어버리고, 와이셔츠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렇게 웃고, 이야기 한다 친구 사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서로는 친구 같다. 형님, 동생 하며 나누는 이야기 속에 친구사..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 돌아가자! 예레미야애가 3장 36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내가 고1때까지도 우리집에는 TV가 없었다. 당연히 초등학교때에도 TV는 없었고 친구집에서 TV보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다. 저녁을 얻어먹고, 친구 부모님이 잠을 자는 10시까지 TV를 보곤 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일찍 들어오라며 경고를 했었고 나는 무시하기 일수였다. 한번은 TV를 늦게까지 보고 집에 왔는데 어머니가 내 옷을 다 벗겨서 대문 밖으로 쫓아내시는 것이었다. “너는 내 아들 아니다. TV가 그렇게 좋으며 그집 가서 살아라” 그때는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가 나를 그렇게 대할 만 하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벌 받을 만 했다”라는 생각 말이다. 당시에는 전화도 없었기 때문에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늦..
못난 사진 나는 시골 깡 촌에서 자랐다. 그러고 보니 내 어릴 적 사진 중에는 못난 사진 하나 없다. 시골 깡 촌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 곳 삶이 어떠한지 짐작하리라. 겨울이면 제대로 씻지도 못해 늘 빨갛게 손이 부르트기 일수고, 콧물은 왜 그리도 잘 나는지. 입가엔 들이마셔도 자꾸만 흐르는 누런 콧물자국이 지나간 자리가 딱지를 이루고 있던 기억. 그런 모습들은 나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억 속에 더 많다는걸 안다. 민망한 사진 한 장 있을법한데, 추억이라 생각하며 웃어넘길 그런 사진 한 장 있을법한데 없다. 내 새끼 예쁘게 보이는 게 즐거움이고, 자랑이고, 힘이라 생각하신 부모님이 한없이 덮어주고, 감싸주고, 가려주셨다. 그래서 민망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 아픈 모습은 그들의 가슴에 묻고 웃는 모습, 행복해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믿음이란 무엇일까? 몇일 전에 딸이 독서실 책상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집사람은 당근마켓을 살피다가 청학리쪽에서 무료나눔 하겠다는 내용을 보고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좋아하던 것도 잠시. 집사람에게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부피가 너무 커서 우리 차에는 안 들어갈 거 같은데 어떡하지?”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일단 약속부터 잡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퇴근하기 전에 전동 드릴을 챙겨 차 뒤쪽에 놓았다. 집사람은 차에 타자마자 “큰 차를 빌려오는 것 아니었어? 난 당신이 봉고차를 빌려오는 줄 알았는데... 이 차는 너무 작아 안 들어갈 꺼야”라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큰 차 없이는 안 간다는 말은 안하고 내 차에 ..
봄 꽃을 봄 가벼운 옷차림을 봄 날씨를 봄 아이들의 미소를 봄 멋진 곳을 같이 가 봄 맛있는 것을 함께 먹어 봄 가족을 봄 하늘을 봄
피하시는 분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마 2:13) 그날 밤, 유난히 빛나는 별에 이끌려 동방에서 부터 온 박사들은 베들레헴에 도착하였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유대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까맣게 있고 있었던 구주에 대한 소식을 이방인인 동방박사로 부터 듣게 되다니,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한 것이 아니었다. 헤롯왕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나는 것인가?”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헤롯왕은 제사장들을 불러 모으고 이 소식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그들이 말하는 구주가 어디에서 나실지를 밝히..
가룟 유다도 받아 마땅한 회복 아담아, 유다야! 아담아, 아담아! 죽지 마라! 너가 죽으면 내가 세상을 구할 계획이 사라진단다 유다야, 유다야 죽지 마라 너가 죽으면 십자가 나의 피가 너를 회복할 기회가 사라진단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시고 함께 식사하셨다. 식사 중에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 옆에 앉기를 원했다. 예수님과의 친근감의 표시라기 보다는 그저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자”라고 스스로 이야기 하는 요한도 그랬고, 주먹이 앞서는 베드로도 그랬으며 사리에 밝은 가룟 유다도 그랬다.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길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낮아지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 그것은 그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상적으로 말씀하시는 타이름이나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유다..
딱 5만원 만큼 헤퍼진 씀씀이 딱 5만 원만큼 헤퍼진 씀씀이 5만 원은 여전히 지갑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어둑어둑해 거리가 잘 보이지 않는 건널목 앞에서 두 번 접힌 5만 원을 발견하다니 기적 같은 일이다. 역 주변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을 텐데 내가 줍기까지 기다려준 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속으로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고 떨리는 마음에 얼른 주워 자전거 탄 왼손에 아무것도 아닌 척 꽉 쥐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빨리 출발하지도, 그렇다고 늦게 출발하지도 않고 최대한 여유 있게 유유히 건널목을 건너 한참을 가다가 오른손으로 넘기며 정말 5만 원이 맞는지, 가짜는 아닌지 확인 하고 슬며시 주머니에 넣었다. 금세 왼손에 땀이 차 있었다. 방금 넣은 5만 원 때문인지 자전거를..